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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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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충환(미술평론가)
아롱다롱은 쌍둥이 팀이다. 그리고 정사면체가 쌍둥이 자아를 상징한다. 펼치면 4개의 정삼각형이 모여 하나의 큰 정삼각형을 이루는, 붙이면 4개의 정삼각형이 4개의 꼭짓점으로 수렴되는 도형이다. 그렇다면 이 도형이 어떻게 쌍둥이 자아를 상징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작은 정삼각형이 모여 하나의 큰 정삼각형을 이룬다는 점에 착안했을 것이다. 다른 정삼각형이 같은 꼭짓점으로 수렴된다는 점에 착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들이 같은 정삼각형의 변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에 착안했을 것이다. 상징은 보통 문화현상에 연유한 것이지만, 이처럼 상징이 개인의 자아를 위해, 개인의 정체성을 위해 소환된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작가의 상징을 비교적 상세하게 풀이했는데, 이건 필요한 일이다. 작가의 작업은 자기상징을 변주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여기에 의미가 덧붙여지는 형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기상징이 바뀔지도 모를 일이나, 최소한 그전까지는 이런 식의 작업이 계속되리라고 섣부른 전망을 해도 좋다. 작가의 작업에는 이처럼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자기상징이 매개가 되고 계기가 되고 그 구심점 역할을 한다. 작업과 자아가 일체를 이룬 경우로 볼 수 있겠고, 그런 만큼 작가의 모든 작업은 자아가 전개되면서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어쩜 겉보기와는 다르게(도형적인 자기? 기하학적인 자아?) 자기반성적인 작업의 경향성을, 그 한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상징을 매개로 작업을 풀어낸다. 정사면체는 4개의 정삼각형으로 구성된다. 4개의 정삼각형이 어우러지면서 가능한 형태를 만들고 변주한다. 작가는 그렇게 가능한 형태며 변주된 형태를 판화로 찍어냈다. 그리고 판화 위에 점선으로 바느질하는 방법으로 동떨어진 정삼각형과 정삼각형을 서로 이어주고, 또 다른 가능한 형태를 암시했다. 전개도에서 보이지 않는 선을 점선으로 표현한 것을 생각하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의 판화는 흡사 기하학적 도형의 전개도 같다. 여기에 바느질은 관계와 연결을 상징한다. 동떨어진 자아와 자아를 연결시켜 하나의 자아가 되게 한 것이다. 부분자아의 단절된 끈을 이어주어 완전체를 복원한 것이다. 그리고 4개의 정삼각형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가능한 형태는 마스킹테이프를 이용한 공간설치작업으로 변주된다. 적재적소의 공간에다 마스킹테이프를 붙이는 방법으로 정삼각형의 변주를 표현한 것인데, 가능한 관계의 유형을 예시해주고 관계에 대한 형식실험을 예시해준다. 그리고 자아상징은 입체설치작업으로도 변주된다. 이번에는 절단된 정사면체가 서로 마주보도록 설치했는데, 다르면서 같은 자아와 자아의 대면을 상징하고, 닮은 듯 다른 자아의 상황논리를 표상한다. 여기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정사면체는 각각 과거에 군산에서 살았던 자아와 현재 파리에 살고 있는 자아의 대면과 만남을 상징한다. 표면 처리한 거울이 서로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것은 바느질을 통한 관계와 연결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볼 수가 있겠다.
오늘도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문리(미술평론가)
미술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조형적으로 창출한 결과물이다. 세상에 있는 오브제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서 제시한다. 그것을 위해 미술가는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응시하면서 사유를 보태서 매일매일 뭔가를 발견해내는 사람들이다. 하늘 아래 새것이 없는 현대미술 판에 당차게 뛰어든 김아롱·다롱. 그들은 쌍둥이로 태어나 하나의 팀으로 활동한다. 그들이 사정거리 밖을 향해 쏘아 올리고 있는 의미와 기호, 상징을 들여다보자.
구(球, sphere)는 3차원 공간에서 한 정점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의 자취를 구면이라고 하고, 이 구면을 경계로 하는 입체를 구라 한다. 반원을 그 지름의 둘레로 1회전 할 때 생기는 입체이다. 회화가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을 구현하기 위한 집요한 탐구는 르네상스 이후, 인간의 이성에 기초해서 기하학과 광학의 발전에 기대었다. 그 결과로 재현회화를 완성한 것이다. 한편으로, 세잔은 모든 대상을 구·원추·원기둥으로 환원해서 표현함으로써 회화의 원근감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면서 현대미술의 포문을 열기도 했다.
이러한 서구미술의 역사적 사유와 궤적을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능동적으로 체득한 김아롱·다롱은 흰 구에 비친 빛을 용서로, 반사광을 회개로, 그림자를 죄로 설정했다. 작가에게 구는 자신 자체이며 무명씨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다. 석고 밴드로 만든 구를 들여다보면, 여호와가 흙으로 정성스럽게 사람의 형상을 만든 것처럼 정성스럽게 빚은 것들이다. 언뜻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저마다 미묘한 변화를 주어 같으면서도 다르다. 2018년, 일상에서 지운 죄를 고하고 회개하는 성당 의자에 구를 하나씩 다소곳하게 놓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사유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적이 있다. 나약해서 무한반복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지만 탈각(脫却)하고 싶은 자아에 대한 신앙고백처럼.
빛의 반사를 이용하여 물체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 기원전 6세기부터 흑요석 거울로 인간은 자기 모습을 응시했다. 청동·철기시대의 금속거울을 거쳐, 기원전 15세기 유리거울, 르네상스 시대에 유리에 주석을 코팅하는 기술을 발명하면서 오늘날의 거울이 생겼다. 인간의 자아 주체성을 명징하게 인식하는 도구. 이 덕택에 화가들은 자화상을 적극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김아롱·다롱은 거울의 속성을 영민하게 활용해서 무한반복적인 공간을 연출한다. 아크릴판에 거울 필름지를 붙인 후, 규칙적으로 줄 세워서 구를 배치함으로써 무한반복적인 장(場)을 구축한 것. 허상으로 충만한 공간 속에 놓인 구(≒인간)는 자리 잡고 있지만, 부유하면서 무한한 무의 공간으로 가라앉는 듯하다. 김아롱·다롱은 구와 거울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도 당신은 안녕하십니까?”라고.
프랑스 파리에서 8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 8대 오지 중 하나인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 있는 연석산미술관 레지던시에서 견고한 작품세계를 탁마(琢磨)하는 김아롱·다롱. 그들이 부여한 예술적 의미와 긍정적인 힘이 세상에 널리 전해져 설득력을 확보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