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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평행한 자아들의 우주

아롱다롱의 기하학과 다중세계

 

안현정 (미술평론가·예술철학박사·성균관대박물관 학예실장)

 

프롤로그-두 개의 자아가 만드는 제3의 우주

 

쌍둥이를 바라보는 오래된 시선은 닮음에서 시작한다. 동일한 얼굴, 비슷한 몸짓, 함께 축적한 시간은 두 존재를 하나의 이미지로 묶는다. 그러나 아롱다롱(ARONGDARONG의 축약, 이하 AD)의 작업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닮음 자체보다 닮은 두 존재가 어떻게 서로 다른 세계를 구축하는가에 놓인다. 김아롱과 김다롱은 동일한 시간의 상당 부분을 공유했지만, 각자의 기억과 감정, 시선과 판단을 축적해 온 독립적인 자아이다. 두 세계가 서로를 비추고 교차하는 순간, 김아롱도 김다롱도 아닌 AD이라는 제3의 작가적 우주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롱다롱은 2016년부터 일상에서 발생한 질문을 원·삼각형·사각형·정사면체와 같은 기하학적 형태로 풀고, 이를 회화와 설치, 판화, 키네틱 아트, 퍼포먼스 영상으로 전개해 왔다. 관객이 직접 설치 내부로 들어가던 초기 방식은 움직이는 기계장치를 바라보고 반응하는 방식으로 이어졌으며, 회화에서는 색채의 대비, ‘비움과 메우기’, 바느질과 사선 자수를 통해 평면 내부에 복수의 공간과 시점을 끌어들였다. 이들의 세계를 관통하는 비평적 틀로 다중세계(multiverse)​를 제안한다. 여기서 다중세계는 물리학의 논의를 작품에 그대로 이식하는 개념이 아니다. 하나의 현실 속에서 여러 가능성이 갈라지고, 각각의 세계가 독자적인 조건을 유지하면서 공존한다는 사유의 틀이다. 이 관점은 ‘나와 닮은 타자’, 현실과 상상, 내부와 외부, 공동 자아와 개인 자아를 지속적으로 교차시켜 온 아롱다롱의 작업을 하나의 긴 흐름으로 묶는다. 다중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중심의 단일성보다 분기와 병존이다. 아롱다롱 역시 두 작가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수렴시키기보다 김아롱, 김다롱, 쌍둥이라는 외부적 이미지, AD이라는 공동의 작가적 자아를 동시에 움직인다. 하나의 이름 안에 여러 자아가 존재하고, 각 자아는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고 반사하며 새로운 좌표를 만든다. 아롱다롱의 미학은 바로 이 복수성에서 힘을 얻는다.

 

질문의 기하학, 상상공간의 조각

 

아롱다롱의 기하학은 형태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인터뷰에서 두 작가는 작업의 출발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질문이 먼저 놓이고, 도형은 그 질문을 번역한 결과물로 선택한다. 도형은 개념을 담는 그릇이며, 필요에 따라 다시 해체하고 변형할 수 있는 표현의 매개이다. 두 작가는 이 과정을 “아롱다롱의 기하학은 상상공간의 조각”이라는 말로 압축했다. 이 말은 아롱다롱의 조형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어린 시절 두 사람은 빈 노트에 함께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은 집과 시대,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상상했다. 그림과 이야기가 서로를 밀어내고 이어받으며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이후 프랑스에서 경험한 미술교육은 형태와 색을 선택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사유하도록 이끌었고, 어린 시절의 상상놀이는 개념적 조형 방법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함께 그린 노트 속 상상세계가 설치와 회화, 기하학적 구조 안으로 이동한 셈이다. 따라서 아롱다롱의 원과 삼각형, 교집합과 정사면체는 수학적 완전성을 향한 기호보다 서사를 압축한 상징체계로 작동한다. 이들의 기하학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숨어 있다. 표면은 절제되고 단순하지만, 그 아래에는 죄와 용서, 현실과 상상, 분단과 기다림, 자아와 타자, 쌍둥이로 살아온 심리적 경험이 포개진다. 형식의 단순함과 내용의 복잡함이 긴장을 이루면서 아롱다롱 특유의 조형 언어를 만든다.

 

〈구〉는 이러한 방식의 대표적인 출발점이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마주한 두 작가는 회개 이후에도 다시 잘못을 반복하는 인간의 연약함에 주목했다. 구는 인간 존재를 은유하고, 빛과 반사광, 가장 짙은 그림자는 용서와 죄, 반복과 내적 갈등을 시각적으로 조직한다. 성당이라는 장소에 놓인 수많은 구는 개인의 고백을 집단적 인간 조건으로 확장하며, 거울 필름 속에서 서로를 끝없이 반사한다. 이때 반복은 같은 것으로의 회귀를 뜻하지 않는다. 각각의 구는 비슷한 형상을 지니면서도 빛의 방향과 위치, 반사의 조건에 따라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의 존재가 매 순간 다른 가능성을 품는다는 사실, 동일한 행위가 반복될수록 다른 흔적과 감정을 축적한다는 사실이 화면과 공간에 새겨진다. 아롱다롱의 반복은 차이를 생산하는 반복이다. 다중세계의 분기 역시 이 지점에서 조형적 의미를 얻는다. 하나의 시작점에서 나온 가능성들이 서로 다른 시간을 획득하고 각자의 현실을 만들어간다.

 

교집합에서 다중세계로

 

〈두 공간과 자아〉는 아롱다롱의 세계관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작업이다. 현실공간과 상상공간을 A와 B로 설정하고, 두 영역이 겹치는 A∩B에 ‘생각하는 나’를 배치한다. 관객은 투명한 PVC 필름으로 제작한 문을 통과하고, 컬러 고무줄과 와이어로 구성한 경계를 지나며 두 공간 사이를 직접 이동한다. 작품은 관객을 공간의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람으로 남겨두지 않고 교집합을 통과하는 주체로 끌어들인다. 교집합은 아롱다롱의 초기 미학을 압축하는 핵심 도식이다. 현실과 상상은 서로를 지우지 않으며, 두 영역의 접촉이 또 하나의 경험을 생산한다. 이 구조를 다중세계의 관점에서 확장하면 교집합은 더욱 역동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두 세계가 같은 좌표를 공유하는 순간 새로운 현실이 출현한다.김아롱과 김다롱의 관계 역시 동일한 운동을 따른다. 두 사람은 각자의 경험을 유지하면서 공동의 작업에서 만난다. 그 만남은 둘의 평균값을 생산하지 않는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세 번째 시선과 세 번째 언어를 만든다. 이러한 관계는 정사면체 작업에서 더욱 정교한 형태를 얻는다. 〈쌍둥이 자아〉는 실제의 나, 거울 속의 나, 실제의 쌍둥이, 거울 속의 쌍둥이라는 여러 자아를 정사면체의 네 면과 연결한다. 정사면체는 어느 면을 바닥에 두어도 동일한 구조를 유지하며, 자신의 쌍대다면체가 다시 자기 자신으로 귀결되는 자기쌍대성(self-duality)을 지닌다. 아롱다롱은 이 기하학적 성질을 자아의 복수성과 지속성을 표현하는 구조로 끌어들였다.

 

특히 거울 필름의 ‘불완전한 반사성’은 아롱다롱의 관계적 자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표면은 자신의 이미지를 반사하면서 동시에 그 너머의 공간을 투과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타자가 함께 들어오고, 외부를 바라보는 순간 자신의 형상이 다시 겹친다. 자아와 타자, 내부와 외부가 끊임없이 서로의 화면에 침투한다. 거울은 여기서 자아를 확인하는 도구이면서 복수의 세계가 한 표면에서 접촉하는 인터페이스로 작동한다. 판화와 회화 역시 이 다중적 자아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펼친다. 판화에서는 우연히 배치한 정삼각형들을 드라이포인트로 인쇄한 뒤 바느질로 연결하고, 회화에서는 정사면체를 완전히 닫기보다 열린 도면과 결합 직전의 상태로 제시한다. 우연과 계획, 분해와 결합, 평면과 입체가 한 화면에서 동시에 움직인다. 완성 직전의 구조는 자아를 고정된 결과로 봉합하지 않는다. 자아는 매 순간 다른 방향으로 수렴하고 펼쳐지는 형성의 과정을 지속한다. 이 점에서 아롱다롱의 기하학은 기호학으로 깊어진다. 원과 정사면체의 외형보다 그 안에 숨어 있는 사회적·심리적 코드가 중요하다. 작가 스스로도 기호를 숨기고, 화면의 매끄러운 표면 안에 사회적 상징과 서사를 배치한다고 설명한다. 관객은 기하학적 형태를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작품 사이를 이동하면서 감춰진 의미의 층을 읽는다. 기하학은 형태의 질서를 세우고, 기호학은 그 질서 아래 존재하는 삶의 복수성을 호출한다.

 

매체의 분기와 ‘생각하는 산책자’

 

아롱다롱은 설치·회화·판화·바느질·키네틱 아트·퍼포먼스 영상을 폭넓게 활용한다. 이 매체들은 하나의 스타일을 여러 재료로 반복하는 방식보다, 하나의 질문에서 갈라져 나온 평행한 세계들을 구성한다. 두 작가는 매체를 선택할 때 ‘이 주제를 얼마나 잘 담는가’라는 적합성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같은 개념도 매체에 따라 다른 시간성을 획득한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신체적으로 체험할 때는 설치가 필요하고, 색과 반복의 감정을 농축할 때는 회화가 앞선다. 분리된 영역을 물리적으로 이어야 할 때 실과 바느질이 등장하고, 움직임의 좌절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때 기계장치가 작동한다. 각각의 매체는 하나의 원본을 복제하지 않고 개념을 새로운 조건 속에서 다시 구성한다. 이러한 매체적 분기는 아롱다롱의 다중세계 미학을 구체적인 경험으로 전환한다. 〈메아리〉는 이를 가장 강렬하게 보여준다. 화면 중앙의 경계선은 보이지 않는 장벽을 상징하고, 음파와 심박수를 연상시키는 바느질은 만나려는 마음의 지속을 기록한다. 뒷면에서 연결되는 실은 가시적 단절 아래 계속 이어지는 관계를 품는다. 키네틱 설치 〈장애물〉에서는 철지와 자석이 중앙의 분단선까지 움직인 뒤 다시 돌아오며, 디에프에서 촬영한 퍼포먼스 영상에서는 건너편으로 날린 종이비행기가 되돌아오는 행위를 반복한다. 하나의 ‘메아리’가 회화, 기계, 신체, 영상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각기 다른 감각을 획득한다.

 

반복적으로 경계에 다가갔다 돌아오는 〈장애물〉의 움직임은 이산가족의 기다림을 물리적 시간으로 치환한다. 관객은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한번 움직임을 지켜본다. 접근과 좌절, 다시 시작하는 운동이 누적되면서 역사적 사건은 현재의 감각으로 들어온다. 퍼포먼스 영상에서도 편지와 종이비행기, 점점 무거워지는 응어리는 소통의 실패와 지속하는 희망을 신체적 서사로 옮긴다. 관객의 위치 역시 작품과 함께 변해왔다. 초기 설치에서 관객은 경계를 통과했고, 키네틱 작업에서는 움직임을 관찰한다. 두 작가는 이 변화가 주제의 성격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밝혔다. 동시에 관객을 궁극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산책자’와 같은 주체로 상정한다. 관객은 작품 속 정답을 확인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가져와 또 하나의 가능세계를 만드는 존재다. 작가의 세계, 작품의 세계, 관객의 세계가 만날 때 다중세계는 계속 새로운 층을 얻는다.

 

김아롱, 보이지 않는 경계와 공감적 무브먼트

 

김아롱의 개별적 우주는 공간과 이동, 경계와 사회적 기억, 타자를 향한 공감의 운동​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어린 시절 부모가 운영한 식당과 슈퍼의 뒤편에 가족의 집이 이어져 있던 공간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한 몸으로 경험하게 했다. 프랑스에서 졸업작품을 화이트큐브 대신 사람들이 오가는 카페테리아에 설치한 경험 역시 자신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추고 싶은 감각, 안과 밖을 오가는 긴장을 다시 불러냈다. 김아롱은 설치에 앞서 공간을 탐색하고 자신의 몸으로 익힌 뒤 관객의 이동을 시뮬레이션한다. 〈문들〉과 〈교집합〉에서 관객은 투명한 문과 고무줄을 직접 만지고 통과하며, 보이지 않던 경계를 몸으로 인식한다. 〈메아리〉와 〈장애물〉에서는 이 공간적 감각이 사회적 기억으로 이동한다. 기계의 반복운동과 충돌음, 예상하지 못한 오류까지 작품의 감정 안으로 끌어들이며, 타인의 고통을 직접 재현하는 방식보다 ‘내가 이 상황 속에 놓였다면’이라는 감정적 전이를 통해 접근한다. 김아롱에게 사회적 문제는 비극을 확대하는 소재가 아니라 인간이 고통 속에서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탐색하는 장이다. 종교에서 체득한 희망의 메타포와 “유명한 작가보다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 역시 이 방향을 지탱한다. 김아롱의 공간은 경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경계를 통과하려는 인간의 움직임을 기록한다. 보이지 않는 경계의 기호학과 공감적 무브먼트가 김아롱의 독립적인 작가 세계를 밀어가는 핵심 축이다.

 

 

김다롱, 기억의 색과 표면을 꿰매는 시간

 

김다롱의 우주는 색채의 기억, 바느질의 촉각, 화면의 깊이와 회복의 시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김다롱에게 색은 감정의 기억을 저장한다. 어린 시절 가족의 귀가를 기다리며 유리문을 열어두었던 저녁, 노을이 집 안으로 스며들고 주황빛 속에서 가족의 검은 실루엣과 긴 그림자가 나타났던 장면은 주황과 검정을 두려움과 기다림의 색으로 각인했다. 이후 이 색들은 작업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프랑스 베르사유의 테라스에서 바라본 노을과 언니와 함께 경험한 서쪽 바다의 빛을 거치면서 애증과 불안의 기억은 치유와 회복의 색채로 이동했다. 바느질 역시 김다롱의 개인적 감각과 긴밀하게 연결한다. 〈두 공간과 자아〉에서 서로 다른 영역을 연결하기 위해 사용한 실은 캔버스의 앞과 뒤를 실제로 관통하고, 색면 위에 미세한 그림자를 만들며 평면에 물리적 깊이를 부여한다. 어린 시절 인형옷을 만들며 축적한 손의 기억은 이 조형적 선택에 촉각성을 더한다. 바느질은 연결의 기호와 신체의 시간을 동시에 기록한다. 김다롱은 화면에서 발생하는 우연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번짐과 흔들림을 다른 색과 선이 받아들이고, 막힌 순간에는 작업을 멈추어 화면의 다음 방향을 찾는다. 스스로 말한 “우연은 필연”이라는 표현은 제작 과정의 유연성과 집중을 압축한다. 현재 김다롱이 가장 깊게 바라보는 자아는 ‘내가 바라보는 나’이며, 공동 작업 속에서 잠시 멈추었던 10년 전의 개인적 기억을 다시 꺼내 노을의 서사를 치유와 회복으로 이어가려 한다. 향후 김다롱의 회화는 기하학적 형태와 더불어 자전적 색채, 바느질의 신체성, 표면의 공간성과 시간성을 더욱 밀도 있게 결합하면서 독자적인 우주를 구축할 것이다.

 

에필로그 - 따로 또 같이, 평행한 자아들의 다음 궤도

 

아롱다롱의 지난 10년은 ‘둘이 함께 작업한다’는 사실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만든 시간이었다. 두 작가는 서로를 가장 가까운 타자로 삼아 질문을 주고받았고, 그 대화를 원과 교집합, 정사면체, 거울과 실, 움직임과 공간으로 번역했다. 공동 작업은 두 사람의 일치를 확인하는 과정보다 차이를 조율하고 새로운 제3의 언어를 생성하는 과정을 축적했다. 다중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들의 현재 위치는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의 세계가 갈라져 둘로 나뉘는 순간보다, 이미 존재하는 두 세계가 각자의 궤도를 넓히면서 새로운 접점을 생성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인터뷰에서 두 작가는 향후 서로 다른 레지던시에서 작업하며 분리된 자아를 탐색하는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동시에 AD을 공적인 작가 자아로 유지하고, 김아롱과 김다롱이라는 사회적·개인적 자아를 각각 심화하는 방향을 상상했다. 이제 아롱다롱에게 필요한 것은 교집합의 반복보다 각 원의 확장이다. 김아롱의 우주는 공간과 이동, 경계와 사회적 기억을 따라 더욱 멀리 뻗어갈 것이다. 김다롱의 우주는 색채와 기억, 바느질과 회복의 시간을 따라 자신만의 밀도를 구축할 것이다. 두 세계가 충분한 거리를 확보할수록 다시 만나는 좌표에는 더 많은 경험과 감각이 들어온다. 분리는 공동체의 약화를 뜻하지 않는다. 분기는 새로운 공동성을 준비하는 창조적 운동이다.

 

이러한 방향은 글로벌 미술계에서 아롱다롱의 정체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쌍둥이 듀오’라는 생물학적 특성은 첫 장면을 만들지만, 오랜 작가적 생명력은 두 개의 개별 우주와 그 사이에서 생성되는 제3의 세계가 뒷받침한다. AD, KIM Arong, KIM Darong이라는 세 개의 이름은 서로 경쟁하는 명칭이 아니라 각기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는 작가적 자아이다. 따라서 ‘따로 또 같이’는 향후 활동을 위한 실용적인 전략을 넘어 아롱다롱의 미학 자체를 설명한다. 두 사람은 함께하기 때문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필요가 없다. 각자의 궤도가 선명할수록 둘 사이의 거리와 접촉, 충돌과 공명 역시 더욱 풍부해진다. 정사면체의 각 면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면서 하나의 입체를 형성하듯, 김아롱과 김다롱의 독립적인 세계는 AD이라는 공동의 우주를 더 크고 복잡하게 만든다. 어린 시절 두 사람은 하나의 빈 노트를 펼쳐 존재하지 않는 집과 시대, 자신들만의 상상세계를 함께 그렸다. 이제 각자 한 권의 노트를 들고 서로 다른 길을 걸을 시간이다. 김아롱은 보이지 않는 경계와 움직임의 궤적을 그리고, 김다롱은 기억의 색과 시간을 한 땀씩 꿰맨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노트가 다시 같은 자리에서 펼쳐지는 순간, 아롱다롱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우주를 시작한다. 아롱다롱의 미학은 두 사람이 얼마나 닮았는가에서 완성하지 않는다. 두 개의 자아가 각자의 세계를 충분히 확장하고, 그 차이가 다시 새로운 공동의 세계를 생성하는 순간 가장 선명한 힘을 획득한다. 평행한 자아들의 다음 궤도는 이제 막 시작했다.

10문 10답 ― 따로 또 같이, 평행한 자아들의 우주

아롱다롱(ARONGDARONG) 아티스트 토크 (진행 : 안현정 미술평론가)

 

1. ‘아롱다롱’이라는 이름은 두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가? 2016년부터 ‘아롱다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활동해왔다. 처음 공동 작업을 시작한 계기와 지금 이 이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AD(아롱다롱 ARONGDARONG의 축약, AD). 처음부터 듀오 작가를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같은 학교에서 각자의 작업을 했는데, 교수들이 두 사람의 작업에서 비슷한 언어를 발견하고 함께 작업해보라고 제안했다. 따로 작업하면서도 늘 같은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도 점차 인식했다. 그렇게 ‘아롱다롱’이 시작했다. 지금은 단순한 팀명이 아니라 작가로 살아가는 우리의 공적 자아에 해당한다. 동시에 김아롱과 김다롱은 서로 다른 경험과 사회적 자아를 지닌다. 그래서 앞으로는 ARONGDARONG이라는 공동의 우주와 두 개의 개별 우주가 어떻게 함께 성장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2. 쌍둥이라는 경험은 작업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어린 시절부터 두 사람을 하나로 보거나 서로 혼동하는 시선을 자주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은 작업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AD. 어릴 때는 쌍둥이라는 이유만으로 지나친 관심을 받거나 서로 비교당하는 일이 많았다. 누군가 우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서로 우열을 비교하는 시선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시기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닮음을 거부하기보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어린 시절에는 빈 노트에 함께 그림을 그리고, 살고 싶은 집과 시대를 상상하며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림일기처럼 두 사람이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놀이도 즐겼다. 서로가 서로를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거울이었던 셈이다. 지금의 ‘쌍둥이 자아’ 역시 나와 닮은 타자를 통해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경험에서 출발한다.

 

3. 왜 원, 교집합, 정사면체와 같은 기하학적 도형을 사용하는가? 아롱다롱의 작업에는 기하학적 도형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작업에서 질문과 도형 가운데 무엇이 먼저인가?

 

AD. 우리에게는 항상 질문이 먼저다. 도형은 질문을 시각적으로 번역한 결과물이다. 원이나 정사면체 자체를 탐구하기 위해 작업을 시작하기보다, 일상에서 생긴 생각을 어떤 상징에 담을 것인지 고민하면서 기하학을 선택한다.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교수들이 “왜 이 형태를 선택했는가”, “왜 이 색이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물었다. 그 경험을 거치면서 형식을 선택하는 이유를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우리가 했던 상상놀이와도 연결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롱다롱의 기하학은 상상공간의 조각”이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단순한 도형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의 책처럼 서사와 감정이 들어 있다.

 

4. 〈구〉, 〈두 공간과 자아〉, 〈메아리〉, 〈쌍둥이 자아〉를 관통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네 작업군은 서로 다른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그럼에도 10년 동안 변하지 않은 중심이 있는가?

 

AD. 결국 관계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어떤 상황을 마주하면 그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고, 서로 답하고 다시 질문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왔다. 한 개인의 내면만을 오래 들여다보기보다 나와 타자, 현실과 상상, 개인과 사회처럼 두 개 이상의 존재가 만나는 관계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향했다. 쌍둥이로 살아왔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생각할 때 이미 다른 한 사람이 함께 들어와 있다. 그래서 아롱다롱의 자아는 고립된 자아보다 관계 속에서 모습을 바꾸는 자아이다. 〈두 공간과 자아〉의 교집합도, 〈쌍둥이 자아〉의 정사면체도 이러한 관계의 구조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5. 아롱다롱에게 ‘반복’은 무엇인가? 〈구〉의 죄와 다짐, 〈메아리〉의 왕복, 회화의 색과 바느질처럼 반복이 여러 작업에서 등장한다. 반복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AD. 일반적으로 기하학은 이성적이고 질서정연한 언어로 읽히지만 우리의 기하학에는 감정이 강하게 들어 있다. 같은 원이 반복해도 그 안에 담긴 감정과 사건은 동일하지 않다. 〈구〉에서는 다짐과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담고, 〈메아리〉에서는 만나려 하지만 다시 돌아오는 역사적 좌절을 반복한다. 회화에서는 색과 바느질의 중첩을 통해 여러 층의 자아를 표현한다. 따라서 반복은 같은 상태의 복제가 아니라 반복할수록 차이가 쌓이는 과정이다. 관객 역시 반복 속에 감춘 작은 차이를 발견하면서 작품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에게 기하학은 어린 시절 상상놀이의 공간으로 관객을 다시 초대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6. 설치, 회화, 판화, 키네틱 아트, 영상 가운데 매체는 어떻게 선택하는가? 하나의 개념을 여러 매체로 확장한다. 어떤 기준으로 매체를 결정하는가?

 

AD. 가장 중요한 기준은 적합성이다. 이 주제를 어떤 매체가 가장 정확하게 담을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한다. 현실과 상상의 공간을 몸으로 통과하는 경험이 중요하면 설치를 선택하고, 색과 반복을 밀도 있게 보여주고 싶으면 회화가 앞선다. 분리된 두 영역을 실제로 연결해야 할 때 바느질이 들어오고, 시간과 움직임 자체가 필요하면 기계장치와 영상으로 확장한다. 제작 과정에서 우리의 생각과 실제 결과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도 한다. 그 균열도 작업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관객이 우리가 생각한 의미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순간 역시 허용한다. 그래서 우리의 작업은 정답을 전달하는 방식보다 질문하고 답하고 다시 질문하는 과정형 놀이와 연결한다.

 

7. 관객의 역할은 왜 ‘참여자’에서 ‘관찰자’로 변화했는가? 초기 설치에서는 관객이 직접 작품 안으로 들어갔고, 최근 키네틱 작업에서는 작품의 움직임을 바라본다. 이러한 변화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가?

 

AD. 미리 계획한 변화보다 주제의 성격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두 공간과 자아〉에서는 현실과 상상 사이를 직접 오가는 경험이 중요했기 때문에 관객이 작품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메아리〉는 이산가족이라는 타인의 고통을 다루기 때문에 처음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찰자의 위치가 필요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원하는 관객은 수동적인 관찰자에 머물지 않는다. 작품을 본 뒤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가져와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주체를 생각한다. 우리는 관찰과 개입이 함께 존재하기를 바란다. 관객이 전시장을 걸으며 자기 생각을 확장하는 ‘생각하는 산책자’로 작품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8. 재료의 우연과 오류는 작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거울 필름, 플라스틱, 고무줄, 실, 철지, 모터 등 성격이 다른 재료를 사용한다. 예상하지 못한 오류도 작품 안에 받아들이는가?

 

AD. 재료는 작업의 현실과 개념이 만나는 지점이다. 처음부터 이상적인 재료만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 필름은 실제 문틀을 제작하는 비용과 설치 조건을 고려하면서 선택했고, 그 현실적인 선택이 이후 새로운 형식 실험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작업 과정에서 서로 크리틱을 하고 재료가 주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계속 확인한다. 키네틱 작업은 전시 공간에 따라 크기와 장치를 조절하며 계속 손을 본다. 같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전시를 거듭하면서 장치가 점차 정교해진다.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일종의 ‘기계적 진화’로 받아들인다. 계획과 현실의 마찰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9. 두 사람의 의견이 충돌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공동 작업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 나올 때 어떤 방식으로 합의하는가?

 

AD. 의견이 갈리면 가장 먼저 작업의 주제로 돌아간다.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시작한 작업인지 다시 확인하면 선택의 기준이 분명해진다. 우리에게 기하학적 형태는 표면에 보이는 첫 번째 언어이고, 그 안에는 사회적 상징과 서사가 숨어 있다. 그래서 형태의 아름다움만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색과 질감, 구도와 설치 방식도 결국 작품이 품은 이야기와 연결해야 한다. 작업노트와 자료조사 역시 이 과정에서 중요하다. 우리의 도형은 기하학에 머물지 않고 기호학적 언어로 움직인다. 관객이 매끄러운 표면을 지나 그 안에 감춘 코드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10. 앞으로의 10년, ‘따로 또 같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난 10년이 ARONGDARONG이라는 공동의 언어를 구축한 시간이었다면, 앞으로 김아롱과 김다롱은 어떤 방식으로 개별성과 공동성을 함께 가져가고 싶은가?

 

AD.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아롱다롱 안에서의 나’를 오래 생각해왔다. 이제 김아롱과 김다롱이라는 개별 작가의 자아를 더 깊이 들여다볼 시점이다. 앞으로 레지던시에 참여한다면 서로 다른 장소에 머물며 각자의 작업을 발전시키는 방식도 생각하고 있다. 김아롱과 김다롱의 사회적 자아와 경험은 분명히 다르고, ARONGDARONG은 두 사람이 함께 구축한 또 하나의 공적 자아이다. 세 자아가 서로 경쟁하기보다 각자의 영역을 확장하는 구조를 원한다. 김아롱의 공간과 움직임, 김다롱의 색채와 바느질처럼 개인의 감각을 충분히 키운 뒤 다시 만났을 때 공동 작업 역시 이전보다 깊어진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따로 또 같이’는 분리가 아니라 분기와 재결합의 과정이다. 두 개의 우주가 각자의 궤도를 넓힐수록 아롱다롱이라는 공동의 우주 역시 더 넓어진다.

 

아티스트 토크 마무리 멘트

 

아롱다롱의 지난 10년이 ‘우리는 무엇을 함께 바라보는가’를 확인한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시간은 ‘우리는 얼마나 서로 다르게 바라보면서도 함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김아롱과 김다롱은 평행한 두 자아이며, ARONGDARONG은 두 세계가 만나 생성하는 또 하나의 우주이다. “따로 또 같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우주가 충분히 멀리 나아갈수록, 다시 만나는 교집합은 더욱 깊어진다.”

 

고충환(미술평론가)

 

아롱다롱은 쌍둥이 팀이다. 그리고 정사면체가 쌍둥이 자아를 상징한다. 펼치면 4개의 정삼각형이 모여 하나의 큰 정삼각형을 이루는, 붙이면 4개의 정삼각형이 4개의 꼭짓점으로 수렴되는 도형이다. 그렇다면 이 도형이 어떻게 쌍둥이 자아를 상징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작은 정삼각형이 모여 하나의 큰 정삼각형을 이룬다는 점에 착안했을 것이다. 다른 정삼각형이 같은 꼭짓점으로 수렴된다는 점에 착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들이 같은 정삼각형의 변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에 착안했을 것이다. 상징은 보통 문화현상에 연유한 것이지만, 이처럼 상징이 개인의 자아를 위해, 개인의 정체성을 위해 소환된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작가의 상징을 비교적 상세하게 풀이했는데, 이건 필요한 일이다. 작가의 작업은 자기상징을 변주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여기에 의미가 덧붙여지는 형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기상징이 바뀔지도 모를 일이나, 최소한 그전까지는 이런 식의 작업이 계속되리라고 섣부른 전망을 해도 좋다. 작가의 작업에는 이처럼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자기상징이 매개가 되고 계기가 되고 그 구심점 역할을 한다. 작업과 자아가 일체를 이룬 경우로 볼 수 있겠고, 그런 만큼 작가의 모든 작업은 자아가 전개되면서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어쩜 겉보기와는 다르게(도형적인 자기? 기하학적인 자아?) 자기반성적인 작업의 경향성을, 그 한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상징을 매개로 작업을 풀어낸다. 정사면체는 4개의 정삼각형으로 구성된다. 4개의 정삼각형이 어우러지면서 가능한 형태를 만들고 변주한다. 작가는 그렇게 가능한 형태며 변주된 형태를 판화로 찍어냈다. 그리고 판화 위에 점선으로 바느질하는 방법으로 동떨어진 정삼각형과 정삼각형을 서로 이어주고, 또 다른 가능한 형태를 암시했다. 전개도에서 보이지 않는 선을 점선으로 표현한 것을 생각하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의 판화는 흡사 기하학적 도형의 전개도 같다. 여기에 바느질은 관계와 연결을 상징한다. 동떨어진 자아와 자아를 연결시켜 하나의 자아가 되게 한 것이다. 부분자아의 단절된 끈을 이어주어 완전체를 복원한 것이다. 그리고 4개의 정삼각형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가능한 형태는 마스킹테이프를 이용한 공간설치작업으로 변주된다. 적재적소의 공간에다 마스킹테이프를 붙이는 방법으로 정삼각형의 변주를 표현한 것인데, 가능한 관계의 유형을 예시해주고 관계에 대한 형식실험을 예시해준다. 그리고 자아상징은 입체설치작업으로도 변주된다. 이번에는 절단된 정사면체가 서로 마주보도록 설치했는데, 다르면서 같은 자아와 자아의 대면을 상징하고, 닮은 듯 다른 자아의 상황논리를 표상한다. 여기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정사면체는 각각 과거에 군산에서 살았던 자아와 현재 파리에 살고 있는 자아의 대면과 만남을 상징한다. 표면 처리한 거울이 서로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것은 바느질을 통한 관계와 연결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볼 수가 있겠다.

오늘도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문리(미술평론가)

 

미술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조형적으로 창출한 결과물이다. 세상에 있는 오브제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서 제시한다. 그것을 위해 미술가는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응시하면서 사유를 보태서 매일매일 뭔가를 발견해내는 사람들이다. 하늘 아래 새것이 없는 현대미술 판에 당차게 뛰어든 김아롱·다롱. 그들은 쌍둥이로 태어나 하나의 팀으로 활동한다. 그들이 사정거리 밖을 향해 쏘아 올리고 있는 의미와 기호, 상징을 들여다보자.

구(球, sphere)는 3차원 공간에서 한 정점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의 자취를 구면이라고 하고, 이 구면을 경계로 하는 입체를 구라 한다. 반원을 그 지름의 둘레로 1회전 할 때 생기는 입체이다. 회화가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을 구현하기 위한 집요한 탐구는 르네상스 이후, 인간의 이성에 기초해서 기하학과 광학의 발전에 기대었다. 그 결과로 재현회화를 완성한 것이다. 한편으로, 세잔은 모든 대상을 구·원추·원기둥으로 환원해서 표현함으로써 회화의 원근감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면서 현대미술의 포문을 열기도 했다.

이러한 서구미술의 역사적 사유와 궤적을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능동적으로 체득한 김아롱·다롱은 흰 구에 비친 빛을 용서로, 반사광을 회개로, 그림자를 죄로 설정했다. 작가에게 구는 자신 자체이며 무명씨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다. 석고 밴드로 만든 구를 들여다보면, 여호와가 흙으로 정성스럽게 사람의 형상을 만든 것처럼 정성스럽게 빚은 것들이다. 언뜻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저마다 미묘한 변화를 주어 같으면서도 다르다. 2018년, 일상에서 지운 죄를 고하고 회개하는 성당 의자에 구를 하나씩 다소곳하게 놓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사유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적이 있다. 나약해서 무한반복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지만 탈각(脫却)하고 싶은 자아에 대한 신앙고백처럼.

빛의 반사를 이용하여 물체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 기원전 6세기부터 흑요석 거울로 인간은 자기 모습을 응시했다. 청동·철기시대의 금속거울을 거쳐, 기원전 15세기 유리거울, 르네상스 시대에 유리에 주석을 코팅하는 기술을 발명하면서 오늘날의 거울이 생겼다. 인간의 자아 주체성을 명징하게 인식하는 도구. 이 덕택에 화가들은 자화상을 적극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김아롱·다롱은 거울의 속성을 영민하게 활용해서 무한반복적인 공간을 연출한다. 아크릴판에 거울 필름지를 붙인 후, 규칙적으로 줄 세워서 구를 배치함으로써 무한반복적인 장(場)을 구축한 것. 허상으로 충만한 공간 속에 놓인 구(≒인간)는 자리 잡고 있지만, 부유하면서 무한한 무의 공간으로 가라앉는 듯하다. 김아롱·다롱은 구와 거울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도 당신은 안녕하십니까?”라고.

프랑스 파리에서 8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 8대 오지 중 하나인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 있는 연석산미술관 레지던시에서 견고한 작품세계를 탁마(琢磨)하는 김아롱·다롱. 그들이 부여한 예술적 의미와 긍정적인 힘이 세상에 널리 전해져 설득력을 확보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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